교육입국(敎育立國). 한국의 고속 성장을 이끈 핵심 비결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교육 시스템이 '고비용·저효율'로 바뀌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사례를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공교육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사교육이 학생들의 실력을 가르고, 결국 부모들의 소득격차가 자녀들의 교육격차로 이어지는 부작용이 점점 커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고소득층이 저소득층에 비해 9배나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14일 교육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액은 전년 대비 4.8% 증가한 25만6000원이었다. 1인당 사교육비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2009년까지 늘다가 이명박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23만6000원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추세는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2013년부터 반전돼 작년에는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25만원을 돌파했다. 고소득층만 경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교육비를 늘린 점이 주목된다. 지난해 월평균 소득 700만원 이상 가구는 전년 대비 5.6% 증가한 44만3000원을 사교육비로 썼고, 그 아래 계층인 월평균 600만~700만원 미만 가구는 1.2% 늘어난 36만5000원을 썼다. 반면 월소득 500만원 이하 모든 계층에서는 사교육비 지출이 1년 전보다 줄었다.
특히 100만원 미만 최저소득계층은 2015년보다 23.6%나 사교육비를 줄이며 고작 5만원을 쓰는 데 그쳤다. 최저소득계층을 최고소득계층과 비교하면 무려 8.9배 차이를 보였다. 2012년 6.3배에서 격차가 훨씬 커진 셈이다.
전문가들은 소득계층별 사교육비 지출격차 확대가 교육을 통한 계층 간 이동을 무너뜨리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지금처럼 공교육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서 사교육 지출이 커지면 계층 대물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가정의 경제 여건에 따라 교육 기회가 달라지는 문제가 심화되면 계층 이동은 갈수록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최필선 건국대 국제무역학과 교수와 민인식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가 2015년 펴낸 '한국의 세대 간 사회계층 이동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2000명의 학생을 10년 동안 관찰한 결과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 자녀의 일반계 고등학교, 4년제 대학 진학률은 각각 51.0%, 30.4%에 머무른 데 반해 상위 20%인 5분위 가구의 자녀는 이 수치가 각각 89.1%, 68.7%까지 올라갔다.
공교육이 평준화된 범용 인재를 키우는 20세기식 교육 방식에 머물다보니 사교육을 통해 특화 과목을 보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해 일반 교과 사교육비가 평균 19만1000원으로 0.6%(1000원) 늘어난 데 비해 예체능 사교육비는 6만3000원으로 19.5%(1만원)나 증가한 게 대표적이다.
정부도 막연하게나마 정답을 알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사교육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록 성과가 더디게 나타나더라도 꾸준한 공교육 정상화를 추진해 내고, 이를 통해 학교 교육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신뢰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청 예산이 인건비 위주로만 가파르게 늘어나는 등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변화를 체감하기 힘든 실정이다. 계층 이동 사다리가 무너지면서 교육이 점점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로 변할 경우 국가 실패의 큰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대런 애쓰모글루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오스만제국이 1445년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기계식 활자인쇄기를 발명한 지 수백 년이 지난 1727년에서야 처음으로 인쇄술을 받아들인 사례를 들었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인쇄술이 엘리트층이 지식을 장악하던 기존 질서를 파괴할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800년 영국 성인 남성 60%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지만 오스만제국은 이 비율이 3%에 불과했다. 이후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쳐 세계를 장악할 동안 오스만제국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극도로 나쁜 교육 시스템이 결국 국가 실패로 이어진 것이다.
[기획취재팀 = 조시영 차장 / 김세웅 기자 / 정슬기 기자 / 이승윤 기자 / 나현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